farewell

[번  호] 18369 / 18404    [등록일] 2001년 10월 30일 01:33      Page : 7
[조  회] 294 건
[제  목] 행복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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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그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곤 했던 익숙한 창가, 그곳에 다시 함께 가는 게 껄끄럽지는 않을까 잠깐 걱정도 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뿌옇게 햇살이 내리비치는 그 창가에서 나는 싸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옛날 그 철없던 시절처럼 잦은 웃음을 터뜨리며 떠들고 있었고, 그도 옛날 그 철없던 시절처럼 두 손을 턱에 괴고 살며시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밤을 꼬박 말해도 웃으며 들어줄 것 같던 예전 모습 그대로, 그렇게 날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뭐가 잘못되어 2년 전 그 때로 돌아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핸드폰을 열어 슬며시 날짜도 확인해 봤다.
2001년 10월 29일.
그와 나는 아직도 99년 가을에 머물러 있는데 시간은 이렇게 훌쩍 우릴 넘어와 버렸구나…

따뜻한 차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창가에 그늘이 드리워질 무렵 우리는 다시 익숙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고 나면 또 안녕일까… 가슴이 아렸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래도록 미워했던 사람. 철없던 대학 신입생 무렵에 그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던 사랑이었다. 풋내기 꼬마에게는 한참이나 높아보이던 듬직한 산 같던 사람.

어느 가을 오후에,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일어서며 마치 내일 또 볼 사람처럼 태연하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커피잔을 쓰러뜨려버렸으면서도 나는 끝내 왜냐고 묻지도, 한바탕 울지도 못했다.
이별의 순간엔 그 사람처럼 담담해야 하는거구나, 그렇게 처연해야 하는거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에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를,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마음을 추스렸다.
정말 내일 또 볼 사람처럼, 그러고도 그 사람은 웃었었다.
너무 아프고 시려, 웃는 그 사람을 바라보기조차 힘들었으면서도 나는 그를 보고 그와 똑같이 웃으려고 노력했다. 입술을 지긋이 다물고 온화한 표정으로… 그렇게.
여느때처럼 날 바래다주던 그의 차에서 내려 태연한 척 뒤로 돌아 집으로 걸어갔지만, 나는 그 때 혹시 격한 울음에 떨리는 뒷모습을 그가 알아차릴까봐 걷는 것조차 힘들었었다.
1년을 설레며 사랑한 사람은 그렇게 나를 떠나가버렸다.

이젠 감정은 다 버리고 기억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향해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로 못할 안타까움에 가시밭을 걷는듯이 아팠다.

오늘은 내가 그를 바래다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데려다 주겠다는 내 말에, 그는 가볍게 한번 사양했을 뿐, 말없이 앞장서는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공항까지 가는 그 긴 시간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먼 길을 왔다 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치 조촐한 그의 가방만 원망스레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한참을 더 달렸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차분히, 그러나 슬프게, 떠날 시간이 임박해서야 그가 들려준 얘기.
혹시나 자신의 주위 환경에 내가 이유없는 고통을 받아야 할까봐, 슬프게 헤어지자 하면 내가 다 감당하겠다고 맘아프게 굴까봐 그렇게 태연한 척 안녕을 말해놓고 많이 힘들었단다.
모질게 마음먹고 공항으로 향하던 날, 이건 아니다 싶은 강한 생각에, 배웅해 주던 사촌누나를 졸라 학교로 길을 틀었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욕심을 부려볼 각오로 그렇게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은행잎 그득한 사이를 웬 남자와 다정히 걸어나오는 나를 봤단다. 팔짱을 꼭 끼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나를 봤단다.
그리고… 자기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쓸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한번 모질게 돌아섰단다.

“그래도 나 때문에 오래 힘들어 하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우리 꼬맹이… 이젠 꼬맹이도 아니지만… 후후… 가끔은 우리가 만나지 말았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들더라. 많이 아팠는데, 나 아픈만큼 너한테도 내가 상처일까봐 걱정 많이 했다.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아 다행이네… 너, 죽을 때까지 못잊을거다… 아마 그럴거야…… 너, 어디 아프다고 징징대는일 없이 건강하게 지내야 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그냥 피식 웃었다. 기억속의 예전 그 사람 웃던 모습을 흉내내며 온화하게.
‘이젠 내가 이렇게 해 줄 차례야’ 하고 마음을 매질하며 담담한 듯 웃었다. 꼭 예전 그 사람처럼.

2년 전 그 가을에, 강의실에서 와르르 몰려나오다가 저 편 도로에 서 있는 고급 승용차와 그 앞에 선 그, 그리고 그의 옷깃을 어루만져 주는, 나완 비교도 안되던 여자를 보고 내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었는지 나는 얘기하지 못했다.
사랑은 자유로운 거라고 늘 말하던, 그의 새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갑자기 눈시울이 뻘개지도록 서럽게 느꼈던 배신감도 나는 얘기하지 못했다.
자신을 빨리 잊게 하려는 그의 모진 배려라고만 생각했었다는 얘기도, 괜시리 친하게 지내던 동기놈에게 팔짱을 끼고 연인처럼 굴며 나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하고 잘 사는 양 보이고 싶었단 얘기도, 하지 못했다.

내가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휙 돌아서서 차에 타버리는 모습에, 아무리 미워도 가까이에서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한심하고 미워서, 그렇게 망설임도 없이 가버린 그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시야에서 승용차가 사라지자마자 동기놈을 붙들고 엉엉 울어버렸단 얘기도… 나는 끝내 삼켜버렸다.

“행복하셔야 돼요. 꼭… 그래야 돼요.”

아주 예전에, 우리가 처음 봤을 때처럼, 그는 가만히 날 보다가 내 머리를 쓰윽 쓰다듬었다. 나도 이젠 어엿한 아가씨가 됐는데 여전히 그에게는 꼬마인 것처럼… 특유의 그 씩 하는 웃음을 웃어 보여주고 그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손을 흔들어 줬다. 담담히. 옛날 그 사람처럼.. 담담히.
이게 아마 우리의 영원한 안녕이겠지. 그는 다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고, 다신 날 찾지 않겠지…

나는 사랑에 서툴렀고, 너무나 철이 없었고,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였고…
그는 사랑에 너무 익숙했고, 자신의 찬란한 배경이 내게 어떤 상처를 가져다 줄 지도 익히 알고 있었던 어른이었다.

그가 내 스무살의 자유로움을 이해하고 지켜주고 싶어 사랑은 자유로운 거라고 말할 때, 나는 그 사람이 오랜동안 구속받고 싶어 하지 않아서 하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고, 그가 내가 잡아주길 원하며 떠나겠다 했을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잡지 않길 바라며 헤어지자는 줄 알았다.

아직도 덜 큰 철없는 숙녀가 모진 세상에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안녕이라 말해준 것을, 나는 버려짐으로 해석했었다.

그 때만큼은 아이처럼 그러지 말자고 졸라도 됐을 것을…
왜 하필 그 순간에 철이 들어버린 건지…

집으로 가려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서 학교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 그 강의실, 그 길 앞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잇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 사이에 비치는 그 사람의 환영이 너무 가슴이 아파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렸다.

잘 가고 있나요 내 사랑.
원망스럽고 미워서 그 이후론 단 한번도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던, 내 소중한 사랑.

난 그 후로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데… 당신은 영영 그걸 모르고 살겠죠…
철없던 꼬맹이가 그저 스치듯 좋아한 사람일 뿐이라고 그렇게 피식 쓴웃음을 베어물고 말아버리겠죠…
마음이 너무 아파 오늘을 후회하는 나를… 당신은 영영 모르고 살겠죠…

행복해야 해요… 정말 행복해야 해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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